4대강유역조사사업은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 국토의 핵심부를 이루는 4대강유역이 보유한 물과 토지자원 등 부존자원의 특성과 개발가능성을 조사하고, 산업의 안정 성장을 보장할 수 있도록 장래 예견되는 용수수요를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수계를 일관한 종합적인 수자원개발계획을 수립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한강유역조사는 미국정부의 특별지원을 얻어 1966년 4월 미국 내무성 개척국(USBR), 지질조사소(USGS), 미 육군공병단(USCOE) 소속의 미국 측 기술진과 우리나라 측 기술요원들이 공동으로 조사에 착수해 1971년 12월에 완료하였다.

4대강유역조사 개요

한강유역합동조사단 창설 당시 기구
낙동강유역조사는 1966년 9월 우리나라 정부와 UNDP/FAO 간에 서명한 운영계획에 의거 같은 해 12월에 발족되었으며, 1967년 3월 FAO에서 선정한 세계 각국의 전문가와 국내요원으로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에 착수해 1972년 3월 완료하였다.

낙동강유역조사단 창설 당시 기구
한강과 낙동강유역조사를 시행하는 중에 금강유역은 1968년 3월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대일청구권자금을 기반으로 당시 낙동강유역조사에 참여했던 일본공영 기술진과 공동으로 조사에 착수해 1972년 2월에 완료하였다.

금강유역조사사무소 개소식
영산강유역조사는 타 유역조사에 참여했던 국내 기술진만으로 1968년 7월에 착수해 1971년 12월에 완료하였다.

영산강유역조사사무소 현판식
1977년 7월에 체결된 한·일 과학기술장관회의 공동성명서에 의거, 1978년 5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회 기술협력회의를 개최한 이래 매년 양국에서 번갈아 개최해 2013년 현재까지 총 36회에 이르렀다. 하천 및 수자원분야의 연구내용을 발표·토론하고 치수와 하천정비 분야에 대해 정보와 기술을 교류해 왔다.


70년대 전국적인 산업화·도시화로 국토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짐에 따라 하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에 변화가 집중됨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검토하고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한강 하류부 도시구간에 대한 대규모 수리모형실험을 실시하였다. 국립건설연구소에서는 한강개발사업에 따라 4차에 걸쳐 한강 하류부(팔당댐~전류리 간 92㎞) 수리모형실험을 시행해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9년에 건설된 운암댐을 운영하던 중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기지인 우리나라에서 미곡 증산을 위한 물 확보와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전력 생산의 필요로 운암댐 하류 2km에 섬진강댐이 1940년 4월 착공되었으나, 전시물자난으로 1944년 9월 댐 공사가 중단되었다. 해방후 1948년 8월 두 번째 착공 되었으나, 1950년 6월 6.25동란으로 다시 중단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제1차 경재개발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1961년 8월 세번째 착공 및 1965년 12월 준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 되었다.

섬진강다목적댐 사업 개요

섬진강다목적댐 전경 및 위치도

섬진강다목적댐 건설광경

남강댐은 남강의 홍수량을 남해의 사천만으로 방류하기 위한 홍수조절 단일목적댐으로 1936년 1차 착공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격화로 1943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8·15광복 이후 1949년 2차 착공 하였으나, 1950년 6·25동란 발발로 또 다시 공사가 중단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포함되어 1962년 4월 제3차로 착공하면서 홍수조절 단일목적댐에서 다목적댐으로 변경되었으며 1969년 10월 준공되었으며, 1999년 보강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남강다목적댐(구댐) 사업 개요

남강다목적댐(구댐) 전경 위치도
남강다목적댐의 방수로는 저수지에서 남해 사천만까지 연결한 연장 11㎞, 폭 50∼150m의 인공수로(가화천)이며, 제수문은 콘크리트중력식댐에 슬루스 게이트(sluice gate) 10문을 설치하였다.

남강다목적댐(구댐) 제수문
소양강다목적댐은 특정다목적댐법(1966.4 공포)에 의해 1960∼1980년대에 건설된 대규모 댐(안동·대청·충주다목적댐 등)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건설된 다목적댐으로, 수도권의 이수·치수 및 수력발전을 주목적으로 1965년 6월 체결한 한일협정의 대일청구권자금을 투입하여 1967~1973년 건설되었다. 댐 위치는 강원도 춘천시 북동쪽 10.3㎞ 지점이자 북한강 합류점에서 소양강 상류 약 12㎞ 지점에 있다.

소양강다목적댐 사업 개요

소양강다목적댐 전경 및 위치도
소양강다목적댐 건설 당시 건설업체가 작업을 할 만한 장비가 없어 정부가 차관자금으로 필요한 장비를 구입해 건설업체에 대여해 주었다. 32톤 덤프트럭 등의 대형장비로 본격적인 기계화시공이 가능해졌으며, 중장비 운전과 수리는 물론 용접을 비롯한 각종 작업의 기능공을 양성 하였다.

소양강다목적댐 연도별 댐 기초굴착수량
소양강다목적댐의 수차발전기 설치는 1971년 5월 말부터 시작했으며 하부구조 토목공사와 병행해 1973년 9월 말에 완료하였다.

소양강다목적댐 수치발전기 설비 개요

소양강다목적댐 수치발전기 설치 광경
소양강다목적댐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공한 대규모 Fill type dam으로, 댐축조는 1970년 5월 사력층부터 축조하기 시작해 1972년 11월 완료하였다.

소양강다목적댐 Core zone 축조와 Filter zone 인접 zone 간의 시공법
댐 좌안부에 5개 조절수문을 갖춘 여수로는 저수지 수위 EL.198.0m에서 5,500㎥/s의 배수능력을 가진다.

소양강다목적댐 여수로 종단면도

1970년 5월 사력층부터 축조하기 시작해 1972년 11월 완료하여 예정공정보다 20일 단축하였다. 첫 해에는 기초처리를 비롯해 9월 하순까지 우기가 계속되어 Core zone과 Shell zone 간에 최대 15m까지 고저차가 생겨 Shell zone 축조를 중지하기도 했으나 같은 해 말에 고저차가 해소되어 순조롭게 시공하였다. 그러나 동기인 11월 후반부터 이듬해 3월 전반까지와 우기인 7월 전반에서 8월 말까지 도합 5∼6개월 간은 Core zone 축조를 중단하고 Shell zone 위주의 축조를 하기도 했다.


1972년 11월 댐축조를 완료해 대통령 임석 하에 담수를 개시하였다. 담수식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때가 유일하였다.

소양강다목적댐 준공 후 2014년까지 41년간 수많은 홍수가 발생했으나 거의 모든 홍수를 완벽하게 조절해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기간 중 여수로를 통한 방류가 13회 있었는데, 이 중 방류량이 3,000㎥/s를 초과하는 경우는 1984년, 1990년, 1995년 대홍수 시 등 단 3회뿐이었다.

소양강다목적댐 준공 후 운영실적
안동다목적댐은 1970년대 경제개발기 낙동강 연안의 생·공·농업용수 공급과 홍수조절 및 발전을 주목적으로 1971~1976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차관 도입으로 건설되었다. 낙동강하구로부터 약 340㎞ 상류지점에 있으며 안동시에서 북동쪽으로 4㎞ 거리에 있다.


안동다목적댐 사업 개요

안동다목적댐 전경 및 위치도
안동다목적댐 건설에는 소양강다목적댐, 섬진강다목적댐 등에서 사용하던 장비 및 국내 조달이 불가능해 아시아개발은행(ADB)차관자금인 외자로 도입한 장비들이 사용되었다. 대형장비들이라서 소양강다목적댐에서 현장까지 운반하는데 도로, 교량 등의 부실로 장비를 반입하는 데만도 2개월여가 소요되었다.

착공전 Dam Site, 댐축
본댐 기초지질은 화강암과 편마암, 편상화강암으로 비교적 양호하며 일부 단층과 파쇄대가 있었다.

안동다목적댐 댐 및 발전소 기초굴착 광경
안동다목적댐의 당초 설계된 심벽재료는 점토였으나 착공 후 조사·시험결과 댐 좌·우안 구릉지 일원에 분포하는 화강토로 변경 사용하였다. 여타 축조재료의 재료원은 댐 부근에 있었으며, 특히 석산은 댐 우안 하류 약 0.5㎞ 하천변에 있었다. 1974년 9월 정초식과 함께 본격적으로 댐 축조를 시작하였다.


하류 유량조정용 역조정지댐은 본댐 하류 약 3㎞ 지점에 있는 높이 20m, 길이 218m의 콘크리트중력식댐으로, 일류부 마루에 폭 12m, 높이 7m의 레이디얼게이트(radial gate) 10문을 설치하였다.

안동다목적댐 역조정지댐
안동다목적댐을 건설 중이던 1975년 12월 15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현장시찰을 하였다. 대구에서 열린 전국새마을지도자 대회에 참석하고 중식 후 헬기로 현장에 온 것이다. 안경모(安京模)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이 현장요원들과 함께 댐 하류 우안 헬기장에서 영접하고 곧바로 좌안 전망대로 이동하였다. 사장이 중장비가 분주히 움직이는 공사상황과 공정을 설명했고, 대통령은 진지한 모습으로 듣다가 간혹 질문을 하곤 하였다. 보고를 받은 후 격려와 당부의 말씀을 한 다음 바로 헬리콥터로 귀경하는 일정이었다. 귀경하기 전에 금일봉(金一封)을 하사하였다. 200만원이었다. 직원들은 격려금에 대한 기쁨도 있었지만 건설역군들을 격려하는 대통령의 순수한 정성을 고마워하였다. 당시 안동댐소장 김종천(金鍾天, 1926~1986) 씨는 토목공학기술자로 상하 모든 동료와 허물없이 지내면서 가끔 기발한 언행으로 인기와 존경을 받던 분으로 별명이 ‘돈키호테’였다. 직원들도 그를 호칭할 때 ‘김호테’ 또는 ‘호테 소장님’이라고 불렀다. 이 호테 소장의 결심으로 하사금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전 직원에게 똑같이 등분해 지급하였다. 직원이 50명 정도이므로 1명당 약 40,000원을 받았다. 당시 평직원 월급이 35,000원 정도였다. 임시직원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결국 한 달 월급 이상을 받은 것이니 월급생활자로서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 날 밤이었다. 들뜬 일부 직원들이 재미 삼아 밤새워 화투놀이를 했는데, 차츰 판이 커져 새벽녘에 한 직원이 어제 받은 하사금 전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난 부인이 다음날 출근한 호테 소장에게 고발하였다. ‘돈키호테’란 별명이 말하듯 소장이 조용히 지나칠 리가 없었다. 당장 도박한 직원 모두를 소장실로 불러들였다. 모두 하위직의 임시직원들이었다. 집무실에서 하늘같이 높은 소장님의 태권도 경기가 한판 벌어졌다. 그야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진풍경이었다. 물론 하사금은 원래대로 원상복구되었다. ‘돈키호테’ 소장이기에 그와 같은 판관(判官)의 모습을 보였다는 일화다. 훌륭한 인품의 돈키호테 소장님! 안동다목적댐이란 훌륭한 작품을 남기고 일찌감치 우리 곁을 떠난 아쉬움은 함께한 건설역군들의 마음속에 세월이 흐를수록 아련히 남아 있다.

안동다목적댐 대통령 시찰 및 준공식
안동다목적댐은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차관도입(1971년 12월 계약)으로 건설되었다. 댐 준공후 ADB에서 사후평가 결과 모범사업으로 평가하며 후속사업인 낙동강연안개발사업에 적극적으로 차관을 제공하였다.

안동다목적댐 사업 연혁
안동다목적댐 치수능력증대사업은 2002년 태풍 ‘루사’ 및 2003년 태풍 ‘매미’와 같은 이상 홍수에 대비하고, 댐 유역의 가능최대강수량(PMP) 및 가능최대홍수량(PMF)이 댐 건설 당시보다 크게 증가함에 따라 댐의 수문학적 안정성 확보를 위해 시행되었다. 기존 여수로와 인접(좌안 기존 여수로에서 좌측으로 50m 위치)해 동일한 형식으로 비상여수로를 2008~2014년 건설하였다.

안동다목적댐 비상여수로 규무

안동다목적댐 비상 여수로 추진 경위

대청다목적댐은 1970년대 경제개발기 대전시·청주시·전주시를 비롯한 금강유역권 도시의 생·공용수 공급과 청주지구, 금강하류부, 만경강유역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1975~1980년 건설되었다. 금강하구로부터 150㎞ 상류지점에 있으며, 대전시 동북쪽 16㎞, 청주시 남쪽 16㎞ 거리에 있다.

대청다목적댐 사업 개요

대청다목적댐 전경 및 위치도
1975년 1월 산업기지개발공사 대청댐건설사무소를 개소하고 1975년 3월 댐 진입도로 착공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이자 금강에 처음으로 다목적댐 건설을 시작하였다. 1977년 1월 기공식, 1980년 3월 담수식, 1980년 12월 준공기념식을 거행하였다.

대청다목적댐 사업 연혁
대청다목적댐은 콘크리트중력식댐과 석괴식댐의 복합형 댐 형식으로, 이는 하상과 우안은 기초지반이 경암이지만 좌안은 두꺼운 표토 아래 풍화암이 깊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댐은 케이블크레인(20톤, 6㎥)으로 타설하였다.

대청다목적댐 기초굴착 및 암반청소

대청다목적댐 시공 광경
대청다목적댐은 공정부진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홍수기 초인 1980년 7월 1일에 담수하였다.대청다목적댐은 공정부진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홍수기 초인 1980년 7월 1일에 담수하였다.

대청다목적댐 담수식 광경 및 당수 당시의 댐
대전도수로는 대전지역의 생·공용수 공급을 위한 시설로 1977년 12월~ 1980년 11월 건설하였다. 주요시설은 취수탑, 도수터널(마제형, D=3.0m, L=3,882m), 조압수조(restrict orifice type), 펌프장 등이다.

대청다목적댐 대전 및 청주도수로
청주도수로는 청주지역의 생·공용수 및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시설로 1977년 12월~1980년 11월 건설하였다. 주요 시설은 취수탑, 도수터널(원형, D=4.0m, L=1,841m), 조압수조(simple type), 펌프장 등이다.

대청다목적댐 대전 및 청주도수로
대청다목적댐의 발전설비는 상공부의 국산화 기술 검토를 거쳐 외자 도입 기기와 국산화 기기로 분리 도입되었다. 수차, 발전기, 변전설비는 일본의 도시바(Toshiba) 제품, 변압기류는 효성중공업 제품이 도입되었다.

대청다목적댐 수차,발전기 설치광경

대청다목적댐 건설 중 유수전환은 반체절의 개수로형 가배수로 방식을 적용하였다.
대청다목적댐 치수능력증대사업은 2002년 태풍 ‘루사’ 및 2003년 태풍 ‘매미’와 같은 이상홍수에 대비하고, 댐 유역의 가능최대홍수량(PMF)이 건설 당시보다 크게 증가함에 따라 댐의 수문학적 안정성 확보를 위해 시행되었다. 구조적 안정성 및 누수 등을 고려해 본댐 상류 좌안 약 3㎞ 지점에 댐식 비상여수로를 2006~2014년 건설하였다.


대청다목적댐 비상여수로 사업 개요

대청다목적댐 비상여수로
충주다목적댐은 4대강유역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한강수계가 보유하는 수자원을 고도로 개발해 수도권을 비롯한 댐 하류지역에 필요한 생·공·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동시에 수력발전 및 홍수조절을 목적으로 1978~1986년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OECF) 및 세계은행(IBRD) 차관도입으로 건설되었다. 댐은 남한강 상류 충청북도 충주시 북동쪽 약 9㎞ 지점에 있다.

충주다목적댐 사업 개요

충주다목적댐 전경 및 위치


충주다목적댐의 건설을 위해 1977년 세계은행(IBRD) 및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OECF) 자금 도입을 추진해, 1978년 1월 OECF 차관협정(14,000백만엔)과 1979년 3월 IBRD 차관(125백만달러) 협정을 각각 체결해 건설재원을 확보하였다.


충주다목적댐 재원 구성 현황

세계은행(IBRD) 차관협정서에 의거 용역회사가 작성한 설계를 검토, 승인해 안전하고 경제적인 댐 설계를 지원하고자 세계은행이 추천하고 산업기지개발공사가 동의한 3인의 댐 설계 및 지질전문가로 Consulting panel을 구성하여 1978년부터 1985년까지 총 13회에 걸쳐 Panel 소집 회의를 하였는데, 이를 통해 원활한 공정추진과 세계적인 기술자들에게 고급기술을 습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1978년 6월 연장 약 5.3㎞의 진입도로공사를 시작으로 1980년 1월 댐 우안 랜드슬라이드지역 굴착 및 1980년 3월 가배수로 굴착공사를 착수하며 본격적인 공사가 진행되었다.

충주다목적댐 사업 연혁

충주다목적댐 시공 광경
댐 우안 랜드슬라이드지역 굴착은 벤치커트공법을 적용하여, 1980년 1월 ~ 1982년 2월 공사하였다.

충주다목적댐 Land slide지역 굴착 현황
1982년 4월 케이블크레인(6㎥, 20톤) 2대를 이용해 본댐 콘크리트 타설을 시작하였으며, 댐 콘크리트는 국내 처음으로 강재슬라이딩거푸집을 사용해 원활한 공정관리와 콘크리트 품질 및 미관을 제고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중용열포틀랜드시멘트(Ⅱ종시멘트)를 사용하였고,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콘크리트혼합설비에 컴퓨터시스템(computer system)을 도입해 콘크리트 혼합재료의 정확한 배합으로 콘크리트 품질관리를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충주다목적댐 기초굴착 및 시공 광경
충주다목적댐의 발전소 수압철관은 용접수압철관 형식이며, 직경 6.5~5.5m 4개 라인으로 구성하였다.

충주다목적댐 발전설비 설치 광경
충주다목적댐 준공 후 2014년까지 29년간 수많은 홍수가 발생했으나 거의 모든 홍수를 완벽하게 조절하였으며, 특히, 공사 중 1984년 대홍수와 준공 후 1990년 및 2006년 대홍수 때 소양강다목적댐과 함께 수도권 홍수피해 경감에 크게 기여하였다.

충주다목적댐 준공 후 운영 실적

사연댐은 1961년 5.16 군사정변 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따른 울산공업지구 조성사업의 부대시설로 1일 100천㎥의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태화지류 대곡천에 1962~1965년 건설되었다.

사연댐 주요 제원

사연댐 표준단면도

사연댐 전경 및 위치도
선암댐은 1962년 6월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됨에 따라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선암제(仙巖堤)를 확장해 낙동강계통 송수관로 유고 시 울산공업단지와 온산공업단지에 비상용수 공급을 위한 용수전용댐으로 1962~1964년 건설되었다. 울산시 남구 선암동에 위치해 있다.

선암댐 주요 제원

선암댐 표준단면도

선암댐 전경 및 위치도
영천댐은 안계댐과 부조취수장에서 공업 및 생활용수를 공급받던 포항종합제철과 연관단지의 규모가 확장되고 포항시의 인구가 증가해 추가로 용수 공급이 필요해지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74~1980년 건설하였다.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및 성곡리에 자리한 영천댐은 금호강 지류로 지방하천인 자호천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영천댐 건설 후 영천댐의 용수공급능력을 확충함으로써 금호강유역을 포함한 경북 동남부지역의 용수 공급에 대처하고 금호강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임하댐을 수원으로 하는 영천댐 도수로를 1991~2001년 건설하였다.

영천댐 주요 제원

영천댐 표준단면도

영천댐 전경 및 위치도
동복댐은 광주광역시 생활용수 수급을 목적으로 섬진강수계 제2지류인 동복천 중류부에 1967년 건설하였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이후 급격한 인구 증가와 산업화로 광주광역시의 용수수요가 증가하여 국내 최초의 콘크리트표면차수벽형석괴댐(Concrete Faced Rockifill Dam)인 신규 동복댐을 기존 동복댐의 하류 150m 지점에 IBRD 차관으로 1983~1985년 건설하였다.

동복댐 주요 제원

동복댐 표준단면도

동복댐 전경
수어댐은 자체유입량과 섬진강 본류에 위치한 다압취수장에서 섬진강의 잉여수량을 취수해 저류한 후 여천공업단지와 인접지역의 생·공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광양공업용수도의 수원시설로 1974~1978년 건설되었다.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섬거리, 수어천 하구로부터 상류 약 9.3㎞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수어댐 주요 제원

수어댐 표준단면

수어댐 전경 및 위치도
연초댐은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의 일환으로 추진한 거제산업기지개발지역 내의 대우 및 삼성조선소 생·공업용수와 인근 지역주민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77~1979년 건설되었다.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덕치리에 위치하고 있다.

연초댐 주요 제원

연초댐 표준단면도

연초댐 전경 및 위치도
구천댐은 거제산업기지개발지역 내의 대우 및 삼성조선소 확장계획에 따라 추가 소요되는 생·공업용수와 인근 지역주민의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84~1987년 건설되었다.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구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구천댐 주요 제원

구천댐 표준단면

구천댐 전경 및 위치도
수도권광역상수도 Ⅰ·Ⅱ단계 사업은 한강의 수질오염문제로 한강에 위치한 취수장을 팔당댐으로 이전한 후 서울·인천·성남의 기존 정수장에 수질이 양호한 원수를 공급해 수원·안양 등의 수도권지역과 반월공업도시에 생·공용수를 공급하고, 수원·안양공업용수도의 취수원을 대체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이후 수도권 일원의 급수난 해소, 인구 증가 및 생활수준 향상에 따른 생활용수 수요 충족, 신도시 건설에 따른 용수 공급시설 확보, 산업화에 따른 공업용수 수요 충족 등을 위해 수도권광역상수도 Ⅲ·Ⅳ단계 사업이 추진되었다.

수도권광역상수도 시설 현황
수도권지역의 급증하는 생·공용수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1999년까지 수도권광역상수도 Ⅰ~Ⅴ단계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Ⅴ단계까지의 수수도시가 수도권에 편중되어 이들 주변의 계속적인 개발로 용수수요가 나날이 증가하는 상황이었으며, 수도권지역의 신규택지 및 도시재정비계획에 의해 중소공단 건설 등 급격한 여건 변동이 야기되었다. 이에 따라 Ⅴ단계 사업 준공 후에도 용수가 부족할 것으로 판단되어 Ⅵ단계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동안 광역상수도(Ⅰ~Ⅳ단계) 건설사업은 정부(건설교통부)에서 시행하였으나 수도권 Ⅴ단계 및 Ⅵ단계 사업은 한국수자원공사가 직접 시행하였다.

덕소정수장 전경(좌측), 팔당3취수장 전경(우측)

춘천댐 건설은 1953년 11월 당시의 긴박한 전력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전원개발위원회(위원장: 상공부장관, 위원: 내무 및 경제 각부 차관, 전기업 3사 사장 및 해당 분야 권위자)를 설치하고 새로운 전원개발계획을 마련해 수력조사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포함되어 1961~1965년 건설되었다. 춘천시 서북방 12㎞ 지점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 용산리 북한강 본류에 위치하고 있다.

춘천댐 주요 제

춘천댐 전경 및 위치도

춘천수력댐 착공 이후 매년 크고 작은 홍수가 발생했는데, 그 중 1964년 8월 12일에 예년에 없던 대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시공중이던 좌안 측 흙댐이 넘치는 물에 붕괴되어 발전소 건물 내부에 흙탕물이 밀려들어 발전소 건물 내에 설치된 모든 기기가 완전히 침수되고 발전기 회전자만을 제외한 경량물 자재가 유실되거나 물과 함께 밀려든 토사에 파묻혔다. 10월 말에야 복구를 완료하였다.
춘천댐수력댐 공사는 우리나라 기술진이 최초로 참여한 댐 축조공사로서 그동안 단절되었던 한·일 관계 정상화로 수력댐 분야의 경험이 많은 일본기술진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1961년 12월 23일 니혼고에이(日本工營)와 역무계약을 체결해 설계서 작성과 감독에 관한 조언을 받아 사업을 추진하였다.

춘천댐 공사 전경
의암수력댐은 상류에 당시 한국 최대의 기설 화천댐, 함께 건설 중이던 춘천댐, 계획 중이던 소양강댐 등이 있었는데, 상류의 풍부한 유량으로 낙차가 작지만 사용가능수량과 발전량이 많고, 양안의 암반이 견고하며, 인근 하상의 골재 채집의 용이 등 수력발전소 건설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1962~1967년 건설되었다. 북한강 본류와 그 최대 지류인 소양강과의 합류지점으로부터 약 4㎞ 하류의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의암리에 위치해 있다.

의암댐 주요 제원

의암댐 전경 및 위치도
팔당수력댐의 건설은 1962년 건설부에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포함된 국토건설사업의 연차 계획을 수립해 각 수력지점 조사를 수행하며 시작되어 1966~1973년 건설되었다. 우리나라 전력의 최대 수요지인 서울의 동북방 35㎞,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류점 하류 7㎞의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 위치해 있다. 팔당수력댐 착공 이후 정부의 수자원 개발 방향이 이전의 발전위주 댐 개발을 지양하고 종합개발을 위한 다목적댐 건설로 추진됨에 따라 한강에서 수력전용댐으로는 팔당댐이 마지막이 되었다.

팔당댐 주요 제원

팔당댐 전경 및 위치도
팔당수력댐 공사시 큰 홍수량과 깊은 수심에 가장 알맞은 강널말뚝을 사용한 셀(Cell) 형 특수가물막이공법을 국내 최초로 도입하였다. 이 가물막이 구조물은 원형 셀을 결합시키고 내부에 자갈 섞인 모래로 충진한다.

팔당댐 셀(Cell)식 가물막이공사 전경진 장면
양수발전은 에너지원을 개발하기보다는 저렴한 전기를 외부에서 얻어 저위치에 있는 물을 인공적으로 고위치에 옮겨 전기요금이 비쌀 때 발전하는 방식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전력수요에 맞춰서 첨두부하 대비를 경제적으로 얻으려고 할 때나 계통수요가 과부족인 경우에 평형을 취하기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수발전소인 청평양수발전소가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상천리에 1975~1980년 건설되었다.

청평양수 상부댐 주요 제원

청평양수 상부댐 전경 및 위치도

청평양수 단면도(좌측), 지하발전소 내부(우측)
삼랑진양수발전소는 장기전원개발 제4차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국내에서 청평양수발전소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양수발전소이다. 부산항 서북방 35㎞의 삼랑진읍에서 동쪽으로 약 3㎞ 위치에 있다.

삼랑진양수 상하부댐 주요 제원

삼랑진양수 하부댐 전경 및 위치도
연례적인 태풍으로 인한 홍수 및 1967~1968 연속된 가뭄 피해로 어려움을 겪었던 영산강 지역의 수자원을 종합적으로 개발하기 위한 영산강농업종합개발사업의 4단계 사업 중 1단계 사업으로 담양댐, 장성댐, 나주댐, 광주댐의 4개 대규모 농업용수댐이 해외차관과 외국기술이 도입되어 1973~1976년 건설되었다. 장성댐은 영산강의 제1지류인 황룡강 상류에 위치하며, 댐의 명칭은 당초 계획 시 ‘북상댐’이었으나 댐의 행정구역상 위치인 북상면이 수몰되어 행정구역 명칭에서 사라져 사업 승인과정에서 ‘장성댐’으로 바뀌었다.


영산강 4개댐 규모 개요

장성댐 전경 및 표준단면도
담양댐은 영산강 상류인 담양군 용면에 축조된 경사코어형록필댐, 댐 설치 후 저수지의 평면 형태가 용의 모습과 닮았다하여 댐 명칭을 계획단계에서 ‘용지(龍池)’라고 했다가 ‘담양댐’으로 변경하였다.

담양댐 단면도

담양댐 및 취수탑 전경
광주댐은 광주직할시 동쪽의 영산강 지류인 고서천에 축조된 중심코어형필댐으로 영산강 4개 댐 중 가장 작다.

광주댐 전경

광주댐 단면도
나주댐은 영산강 지석천 상류의 대초천(大草川)에 설치된 중심코어형필댐으로 공사 때에는 ‘대초댐’으로 불리다가 후에 ‘나주댐’으로 바뀌었다.

나주댐 전경

나주댐 단면도
계화도방조제는 건설부가 주관한 동진강 수리간척사업에 의해 토지개량조합연합회(한국농어촌공사 전신)가 건설부로부터 기술용역 역무를 위임받아 1963~1968년 건설한 전라북도 부안군에 위치하는 방조제이다. 1962년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섬진강다목적댐과 칠보발전소 공사를 포함시키며 연계사업으로 동진강 수리간척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 사업은 제1호 방조제 9.2㎞와 제2호 방조제 3.6㎞를 설치해 내측에 간척농지 4,270ha를 조성하고 청호저수지를 설치해 새로 증설된 섬진강다목적댐의 칠보발전소에서 사용된 발전방류수를 도수해 저류한 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계화도방조제 위치

동진제2호방조제 물막이공사(한국수리사, 1996)


정부는 1970년대부터 주곡의 자립자족과 식량증산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기조에 따라 대단위지역에 대한 농업종합개발계획사업을 추진하였다. 아산방조제는 평택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는데 경기도 평택시·화성군과 충청남도 아산시·천원군(현재 천안시) 등 2도 4개 시·군에 걸쳐 있는 평택평야를 개발하기 위해 안성천 하구인 아산만에 하구를 가로막는 아산방조제를 1970~1973년 축조함으로써 해수 유입을 차단하고 바다였던 이곳에 아산호(牙山湖, 경기도는 현재 평택호라 칭하고 있음)를 조성해 수자원을 확보하는 사업이었다. 따라서 아산방조제 공사는 최초의 하굿둑 공사라 할 수 있다.

아산방조제 및 삽교천방조제 위치도


아산방조제 및 아산호 개요

아산방조제 표준단면도
방조제 공사의 성패는 끝막이 공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산호를 조성하기 위한 하굿둑 공사는 수심 7~8m, 9m의 조위차와 하루 두 차례 드나드는 조석량 190백만㎥에 이르는 바다와의 싸움이었다. 착공한 지 2년 3개월 만에 가장 힘겨운 고비로 여겨졌던 끝막이공사를 성공시키면서 공사 착공 3년 만에 방조제 공사를 완성하였다. 물막이공사가 성공하기까지는 개당 2톤 이상의 중량을 가진 돌망태공법이 주효했는데, 유속에 저항하는 힘이 커져 유실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산방조제 끝막이공사는 대조기간을 넘긴 1973년 2월 26일에 마침내 바닷물 차단에 성공하였다.

아산방조제 끝막이공사 완료

끝막이공사 구간에서는 최대 8.0m/s의 유속이 발생해 1∼2톤 정도의 보통 돌망태를 개개로 투입하면 제자리에 유지되지 못하고 많은 양이 유실되었다. 이에 따라 직경 10∼13㎜의 철근으로 여러 돌망태를 하나로 결합해 일시에 중장비로 밀어넣은 결과, 투입된 전체 재료가 약간 세굴될 정도로 가라앉을 뿐 큰 유실 없이 계속 작업이 가능해져 물막이공사를 성공적으로 완료할 수 있었다. 즉 물막이공사가 성공하기까지는 개당 2톤 이상의 중량을 가진 돌망태공법이 주효했는데, 유속에 저항하는 힘이 커져 유실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산방조제 끝막이공사는 대조기간을 넘긴 1973년 2월 26일에 마침내 바닷물 차단에 성공하였다
삽교천방조제는 삽교천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중서부 해안 일대인 충남 아산시, 당진군, 홍성군, 예산군 등에 걸친 24,574ha를 가뭄과 홍수피해가 없는 전천후 낙토로 개발하려는 목표로 추진되었다. 이 지역은 광대한 평야에 농경지와 구릉지대, 간석지 등을 갖추었지만 용수원을 확보할 수 없는 지형적 여건으로 한해가 되풀이되어 왔다. 또한 삽교천 하구로 밀려드는 조수의 영향으로 연안의 많은 농경지가 염해와 홍수 시에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 아울러 농경지 확장의 여지가 많음에도 황무지로 방치되는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삽교천을 수원으로 하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을 시행하였다.

삽교천방조제 및 삽교호 개

삽교천방조제 및 배수갑문 전경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10·26사태로 서거함으로써 이날 오전의 준공식 행사가 마지막 공식행사가 되었다. 1960년대 및 1970년대에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농업생산기반 조성사업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중요한 국가정책으로 삼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영산강하굿둑은 영산강 유역의 수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세계은행(IBRD)차관 도입으로 1978~1981년 건설되었다.

영산강하굿둑 설치 개요

이 지구는 총무처가 매립한 시내 용산구 이촌동 공무원아파트 전방 하천부지로 1968년 9월 19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건설부로부터 처음으로 한강 연안의 매립허가를 받아 402,735㎡(121,827평)을 매립하였다. 매립 시에 불규칙한 하상을 정리해 유수 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실시했는데, 외각제는 강변도로(한강북로)를 겸하기 위해 20m의 노폭으로 하였다. 총공사비 약 8억원을 투입해 제방 2,200m의 매립공사를 1969년 6월 15일에 준공해 현재의 서빙고 맨션아파트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제방 표준단면은 비탈경사 1:2.5에 호안은 블럭으로 했으며 돌망태로 밑다짐을 하였다. 제방 둑마루 폭은 20.0m로 했으며, 제방 위에 콘크리트 파라페트를 0.8m 높이로 설치하였다. 여유고는 1.8m(계획홍수위 EL.14.63m, 제방고 EL.15.63m, 파라페트고 EL.16.43m)로 계획하였다.
한강 여의도지구는 수해상습지구로서 매년 막심한 홍수피해를 당하는 데서 벗어나는 한편 나날이 팽창하는 서울시의 인구 수용을 위해 택지 조성으로 현대식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울특별시장은 1968년 8월 13일 건설부장관의 공유수면매립허가를 받아 100일간의 주야 돌관작업 끝에 사상 유례 없는 단기간에 윤중제 축제공사를 완료하고 이어 내부 매립공사를 1972년 12월에 준공하였다.

여의도 윤중제 표준단면도
한강 여의도지구는 수해상습지구로서 매년 막심한 홍수피해를 당하는 데서 벗어나는 한편 나날이 팽창하는 서울시의 인구 수용을 위해 택지 조성으로 현대식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울특별시장은 1968년 8월 13일 건설부장관의 공유수면매립허가를 받아 100일간의 주야 돌관작업 끝에 사상 유례 없는 단기간에 윤중제 축제공사를 완료하고 이어 내부 매립공사를 1972년 12월에 준공하였다.

여의도 윤중제 표준단면도

5·16군사정변(1961년)으로 신정부조직법이 제정되면서 경제기획원 소속하에 국토건설청을 두고 하부 직제로 수자원국 이수과에서 재해대책업무를 관장하였다. 그 해 7월 전북 남원과 경북 영주지방에 재해가 발생하자 8월 21일 각령 제104호로 각의 의결을 거친 임시영주수해복구사무소 및 임시남원 수해복구사무소 설치에 관한 건을 공포하였다. 수해복구사무소의 주요 임무는 피해지역의 복구공사에 대한 전반적인 관리와 지도감독으로 현장지휘본부 성격의 순수재해대책업무를 위한 조직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최초로 법제도화 되었다.
한강 잠실지구는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넓은 홍수피해 상습지구로 매년 막대한 피해를 당하였다. 서울특별시가 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해 1974년 말까지 외곽제방 축제공사를 완료하였다.

잠실지구 표준단면

곡창지대인 영호남 일대에서 1967∼1968년 간에 대가뭄이 일어나자 항구적 가뭄 대책을 위한 농업용수개발계획이 수립되었다. 1969년 농업용수로 지하수 개발을 본격화하기 위해 지하수개발공사를 설립했으나, 1970년에 「농촌근대화촉진법」 제정으로 토지개량조합연합회와 합병해 농업진흥공사로 변경되었다. 농업진흥공사는 1970년대 이후 농업용수 개발과 함께 근대화된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